한국의 승마는 고대사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농경 및 교통수송수단으로 이용되는 한편 전쟁에서는 꼭 필요한 전쟁수행 수단으로 발달되었으며 기사(騎射)·기창(騎槍)이라 하여 궁시(弓矢)나 장창·도검(刀劍)과 더불어 중요한 무예기술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말을 부리며 장대로 공을 치는 격구(擊毬)라는 스포츠는 일찍부터 성행하였습니다. 한국 승마가 무예로서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조선시대 광해군 때부터 무과 채용고시에 포함된 마상재(馬上才)라는 승마기술이 대두한 때부터입니다. 마상재는 한국 승마 자체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는 데 큰 몫을 하였습니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전하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에는 수렵도(狩獵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는 산악 지대에서 4명의 말을 탄 무사가 활을 쏘며 사냥하는 모습입니다. 말을 탄 무사가 호랑이를 쫒아 가면서 전방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으며, 다른 장면은 말 위에서 상체를 뒤로 돌린 무사가 활시위를 당기면서 좌사 하는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오른손에 활을 잡고 왼손으로 화살을 시위에 걸어 180˚뒤를 향한 자세로 우 후방에 있는 사슴을 향해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쌍영총(雙楹塚)에도 마상 궁술(馬上 弓術)인 기사(騎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치「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기사(騎射)와 유사한 모습입니다. 마상 궁술인 기사(騎射)뿐 아니라 마상 장창을 이용한 기창(騎槍)도 고구려 고분에 나타납니다. 삼실총 고분에는 2인의 기수가 말을 타고 매우 긴 창으로 교전을 하는 벽화가 있고 안악 3호분의 대 행렬도와 쌍용총의 고분 벽화에는 왼손에 장창을 쥔 기수가 행렬을 따라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따라서 고구려에는 기창(騎槍)이 주요 무예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백제에서도 기마전(騎馬戰)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말을 타고 행하는 수렵의 형태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기병을 중요시하였으며 이에 대한 기록이 「三國史記」에 나옵니다. 온조왕 10년(기원전109년)에 보면 "10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으로 침략하였다. 왕도 군사 200명을 보냈으나 말갈의 곤미천상(昆彌川上)에게 패하여 청목(靑木山)에 올라가서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왕이 친히 정예 기병(精騎)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와 이를 구원하자 적들이 도망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탈해왕 8년(64년)8월에 백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와산성(蛙山成)(지금의 보은)을 공격하였다. 10월에 백제는 또 다시 구양성(狗襄成)을 공격하므로 왕은 기병(騎兵) 2000명으로 하여금 적을 역습하여 물리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한편 광개토대왕 3년(394년)에 왕은 백제의 정예군을 기병(精氣) 5천으로 역습하여 물리쳤으며 안원왕(522년)도 정예 기병(精氣) 5천으로 백제군을 물리쳤습니다. 윗 기록 외에도 삼국 기병에 관한 많은 자료가 나오고 있으며 삼국간의 전쟁사 또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고려에는 신기군(神騎軍)이라는 기병이 있었습니다. 숙종 9년(1104년)에 윤관의 건의에 의하여 여진을 정벌하기 위한 목적으로 별무반을 두었습니다. 이 별무반에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 신기군(神騎軍), 보병을 중심으로 한 신보군(神步軍), 승려를 중심으로 한 항마군(降魔軍)이 있었습니다. 특히 신기군은 여진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편성된 특수 부대로 문무 양반, 이서(吏胥)상인, 노예 및 양인 중에서 말을 가진 자는 모두 이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신기군은 군마를 각자가 조알하게 하여 양반의 자제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면군(免軍)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전력은 자연히 약화되었습니다.
한편 무인 집권시 마별초(馬別抄)라는 기병 제도도 있었습니다. 최우는 날마다 마별초(馬別抄)로 하여금 기사(騎射)를 단련하게 하였으며 또한 수렵을 즐겼습니다. 마별초는 고려 최씨 무인 정권의 기병 부대를 말함인데 최우가 몽고의 영향을 받아 편성한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우는 1229년 자기 집에서 도방(都房)과 마별초의 격구와 기사(騎射)를 관람하였다고 합니다.
마별초(馬別抄)는 기병 중에서도 다시 선발을 거친 별초입니다. 별초는 최씨 무인 정권의 기병(騎兵)으로서 그 편성은 호위 체제에서 출발합니다. 이로부터 기존의 보병기는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한편, 14세기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수렵도인"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에는 말을 탄 무사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활을 메고 힘차게 말을 달리면서 사냥을 하는 인물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이제현(李齊賢)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도 사냥을 나가는 기마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는 일종의 수렵도입니다. 여기에서 고구려의 수렵 전통을 이어받고, 몽고의 영향을 받아 수렵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기사(騎射)는 무예로서 중시하였습니다. 기사는 무과 초시 및 복시에 부과하는 무예로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면 1발에 5점을 부여하였습니다. 한편 조선 태조 이성계는 마상 궁술인 기사(騎射)뿐만 아니라, 마상재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1362년 7월에 이성계가 원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몸을 숨기는 동작으로 피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때는 마상 무예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인 마상재(馬上才)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격구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무예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 태종 때 설치되어 왕의 친위대 역할을 한 겸사복(兼司僕)은 기마 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겸사복의 선발 시험을 보면 기사(騎射), 마수(魔手)가 보사(步射)와 함께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겸사복에 관한 교열이 봄과 가을에 걸쳐 시행되고 이에는 기사(騎射), 기창(騎槍)이 포함됩니다. 결국 겸사복의 선발이나 교열은 지상 및 마상 궁술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지며 마상 무예 중에 기창, 기사, 말 다루기 외 간단한 마상재가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상 무예가 체계화 된 것은 1790년(정조 14년)에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가 무관(武官)인 백동수(白東修)의 도움을 받아 펴낸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에 의합니다. 여기에 기창(騎槍),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편곤(馬上鞭棍) 4기와 격구 마상재(馬上才) 2기 등 마상 무예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말을 타고 이루어지는 마상 무예가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